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트린 드 메디시스 (문단 편집) === 발루아-앙굴렘 왕가의 멸망 === [[앙리 3세]]는 어머니와 다른 정치적 노선으로 인해 갈등을 빚었고, 결국 [[1588년]] 어머니의 조언자들을 모두 해고했다. [[앙리 3세]]는 카트린을 >'''왕들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국가의 어머니''' 라고 높여불렀으나 단지 그 뿐이었고, 당시 이미 심한 폐렴에 걸려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있었던 카트린은 모든 정사에서 배제되었다. 이후 앙리 3세의 행보는 그를 결국 파멸에 이르게 했다. [[앙리 3세]]는 기즈 공작을 대놓고 적대시하기 시작했는데, 기즈 공작은 [[프랑스]] [[가톨릭]] 세력의 구심점이자 그야말로 핵심이었기 때문에 앙리 3세는 자신의 세력 기반에서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. 거기다 앙리 3세는 정치적 동맹자로 이전까지 자신을 충실히 지지하던 기즈 가문이 아니라 [[개신교]] 측인 나바르의 앙리([[앙리 4세]])를 선택했는데, 이 역시도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. 어머니 카트린의 말을 듣지 않기는 했지만 종교적 관대함만은 어머니와 닮았던 앙리 3세는 나바르의 앙리([[앙리 4세]])와 가까워진 이후, 위그노파와 화해를 추진하는 정책을 펴려 했다. 큰 모욕을 받았다고 여긴 [[가톨릭]]파의 보스 격인 기즈 가문의 두 형제(기즈 공과 [[추기경]])는 이에 [[스페인]] 왕 [[펠리페 2세]]의 지원을 받아 아예 앙리 3세를 축출해버리고자 했는데, 강력한 신하들을 왕권으로 견제할 수단이 없었던 앙리 3세는 [[1588년]] [[12월 23일]] 기즈 형제 둘을 '''전부 다 암살'''하는 막장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. 이 암살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카트린의 병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. [[1589년]] [[1월 3일]] 그녀는 오랜 친구인 부르봉 추기경[* 사위인 [[앙리 4세|앙리 드 나바르]]의 숙부였다. 그는 신교도인 앙리 드 나바르에 반대해 신성동맹, 즉 가톨릭 동맹에서 대립 후계자로 내세운 인물로 [[앙리 3세]]에 의해 기즈 형제가 암살당할 때 왕에 의해 구금되어 있었다.]을 방문하여 >"아, 그 가련한 아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오. 그는 자신의 모든 걸 무너트려 폐허로 만들고 있소." 라고 말했다. 그리고 이틀이 지난 1월 5일,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쓸쓸하게 블루아 성에서 사망했다. 평생을 발루아-앙굴렘 왕조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바친 삶이었으나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 채 모두에게서 잊혀진 채로 임종을 맞게 되었다. 죽어서도 카트린에 대한 취급은 매우 비참했다. 그녀의 시신은 약식 장례를 치른 후 블루아 성당 바닥에 묘비도 없이 묻혀 있었다. 이렇게 모두에게서 잊혀져 버린 카트린은 훗날 자신의 자식도, 사위도 아닌 의붓딸에 의해 비로소 안식을 찾게 된다. [[앙리 2세]]의 서녀였던 디안 드 프랑스가 >"[[앙리 2세]]의 부인인 카트린이 죽어서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건 너무나도 부당하다" 고 나섰던 것이다. 결국 디안에 의해 카트린은 생 드니 성당의 왕실 묘역으로 이장되어 남편 앙리 2세 곁에 잠들게 되었다. 이제 카트린이 역사에서 퇴장한 이후 남은 그녀의 마지막 아들인 [[앙리 3세]]로 다시 돌아가자면, 기즈 공작의 암살 이후 [[앙리 3세]]는 어찌되었든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[[가톨릭]] 측에서 볼때 그야말로 원수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. 가톨릭 측이 주류인 수도 [[파리(프랑스)|파리]]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[[앙리 3세]]는 도망을 쳤는데, 도망간 곳이 나바르 국왕 앙리([[앙리 4세]])가 이끄는 위그노 군대가 있던 곳이었다... 나바르의 앙리([[앙리 4세]])는 일단 [[앙리 3세]]와의 친분도 있었고, 그가 자신을 프랑스의 차기 국왕으로 인정했기에 기꺼이 프랑스의 국왕으로 대우해줬다. 하지만 얼마 못가서 [[앙리 3세]]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. 모후 카트린이 사망하고 8개월이 지났을 때, 암살당한 기즈 형제의 원한을 갚는답시고 광신적인 가톨릭 [[수도자]]가 앙리 3세를 면전에서 칼로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. 이로 인해 [[백년전쟁]]에서 살아남으며, 프랑스의 왕좌를 지켰고,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도 노리던 발루아 왕조는 초라하게 몰락하고 말았다. 결국 마지막으로 승리한 사람은 발루아 가문도, 기즈 가문도 아닌 카트린의 평생의 적이었던 부르봉 가문의 [[앙리 4세]](나바르의 앙리)였다. 카트린, 기즈 가문, [[앙리 3세]]와 같은 앞선 역사의 주역들이 모두 몰락하고 [[가톨릭]] 세력이 허무하게 무너져내린 후, 나바르의 앙리([[앙리 4세]])는 자신의 왕국인 나바르로 돌아가 한동안 힘을 기르다가 잉글랜드를 위시한 각국의 개신교 군대의 도움을 받아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로 진격한 후 포위했다. 그러던 중 파리 시는 [[앙리 4세]]를 왕으로 받아들이되 그가 [[가톨릭]]으로 개종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, 그는 즉시 가톨릭으로 회심[* '회심'은 원래 [[가톨릭]]이었던 사람이 다른 종교로 오랫동안 개종해 살았다가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와 재개종하는 걸 말한다. 실제로 [[앙리 4세]]는 [[위그노]]로 자라긴 했으나 어릴 적에는 정말로 가톨릭 교회에서 [[세례성사]]를 받았다.]한 뒤에 즉위하고 [[부르봉 왕조]]를 창시했다. 이 때 [[앙리 4세]]가 한 유명한 말이 바로 >'''"[[파리(프랑스)|파리]]는 [[미사]]를 드릴 가치가 있지!"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